오랜 만에, 정말 사람을 부끄럽게 만들고 마음속에 깊은 울림을 주고 떠난 <그 청년 바보의사>를 다시 펼쳐보게 되었습니다. <그 청년 바보의사>는 고 안수현 청년의사의 숭고한 삶을, 그가 떠난 뒤 그의 글과 함께 이기섭 작가가 엮은 책입니다. 고 안수현은 고려대 의학과 91학번 출신 내과 전문의였는데, 33세의 젊은 나이까지 불꽃 같은 신앙의 삶을 살다가 2006년 유행성출혈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청년의사 안수현은 환자들에게 따뜻했고, 동료들에게 친절했습니다. 환자의 마음속까지 들여다보며 그들의 아픔을 헤아리는 참된 의사였습니다. 글도 잘 써서 '스티그마'라는 ID로 신앙과 음악과 책에 관한 글을 쓰는 작가이기도 했습니다. 고 안수현의 싸이월드는 새롭고 다양한 클래식 음악과 CCM, 좋은 책들을 소개하고 나누는 문화공간으로도 유명했습니다.
그가 아무도 모르게 헌혈한 게 30회가 넘습니다. 적십자에서 주는 헌혈유공장 은장을 받았지만, 그가 죽기 전에는 아무도 그 사실을 몰랐습니다. 바보로 여겨질 만큼 주기만 하던 고 안수현 청년의 삶을 다시 한 번 더듬어 보며, 오늘 나는 잘 살고 있는가 되짚어 봅니다.
<그 청년 바보의사>는 2009년 문화관광부 우수교양도서로 선정되기도 하였습니다.
안수현 지음(1972. 1. 17.~2006. 1. 5.) - "예흔" 리더, 한국누가회 활동...
이기섭 엮음
추천의 말: 시골의사 박경철
"그가 그립습니다"
죽음 이후에 자신을 그리워하는 사람이 많다면 성공한 인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이 젊은 의사는 조금 일찍 우리 곁을 떠났지만, 우리 중 어느 누구도 다다르지 못한 성취를 이룬 사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이 책을 내기 위해 발 벗고 나선 그의 동료 선후배들, 그리고 그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기꺼이 추천사를 쓰는 저까지 많은 사람들이 그를 그리워하고 있으니까요. ...
2000년 의약분업사태로 의사들이 파업에 나섰을 때 그는 가운을 입고 진료실을 지켰습니다. 동료 의사들이 극단적인 선택을 할 때는 그것의 옳고 그름을 떠나 참여하는 것이 보편적인 태도일 것입니다. 더구나 서열이 엄격한 의사 사회에서 동료들의 결정을 저버리고 홀로 행동하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기도 하고요. 헌데 이 젊은 의사는 그 순간에도 환자를 지켰습니다. 그러나 동료 중 누구도 그를 탓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지고의 가치는 자신을 필요로 하는 환자 곁에 함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
차례
1. 그 청년 바보의사
배꼽 동맥 이야기 / 은진이 이야기 / 나 두렵지 않아요 / 한밤중의 사발면 배달 /
유로키나제(혈전용해제) 사건 / 내가 누구에게 좋게 하랴? / 코람 데오(CORAM DEO) / 성분 헌혈을 하며 /
주 나의 모든 것 / 내과 입국식 / 지금, 사랑하기 가장 좋은 시간
2. 홀로 남은 의사
마지막 크리스천 / 암환자에게 소망을 주었던 노래 / 복기할 수 있는 삶 / 조선족 할아버지 / 개입 /
Jesus, Be the Centre
3. 아주 특별한 처방전
소아암 병동의 어린이날 / 동엽이 어머니 / 어떤 보호자의 편지 / 나환자를 위한 아름다운 손, 폴 브랜드 /
응급실, 새벽 2시에 읽던 책 / 책 까마귀 / 내과 중환자실 11번 침대 / 이보도 더 좋은 약은 없다 /
약속의 땅에도 기근은 오는가 /
4. 보이 소프라노였던 소년
코러스의 추억 / 카르미나 부라나 / 명반(masterpiece) / 믿을 만한 권고안, 펭귄 가이드북 /
두 손이 전하는 희망 메시지 / 음악으로 배우는 똘레랑스
5. 외로운 양치기
끈질긴 녀석 호진이 / 양들을 먹이라 / 홀딱 젖다 / 도어 투 도어 서비스 10년 / 본 / 어린양의 방문 /
키다리 아저씨 되어주기 / 가을의 시작, 예수원에서 / 담을 뛰어넘기 / 작은 자를 돌아봄 / 작은 기쁨
6. 그분을 위한 노래
바로 그 성가대를 꿈꾸며 / 소망, 그 영원한 화두 / 고통 중에 부여잡은 그의 신실하심 / 아버지와의 대화 /
파티로의 초대 / 스플랑크니초마이 / 단 한 분의 청중 / 선영이의 친구가 되어 / 나는 그 여자가 아니다 /
프로페셔널 아마추어리즘
7. 한 방향으로의 오랜 순종
13중대 스나이퍼 / 군의관의 안수기도 / FM을 넘어 생리식염수로 / 블레이드 소동 / 피 /
부재함의 사역 / 소명 / 어둠 속의 노래
8. 그리고 어찌하여
9. 흔적들
*병실에 누운 한 환자가 아까부터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한밤중 병실의 불은 이미 꺼져 있습니다. 주로 암환자들이 누워 있는 6인 병실에는 내일 떠오르는 태양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르는 누군가의 아버지, 누군가의 남편, 누군가의 아들 들이 한 숨, 한 숨을 가늘게 쉬고 있습니다.
병실의 문이 가만히 열리는군요. 의사 가운을 입은 듬직한 체구의 청년 한 명이 조용히 들어와 환자 곁으로 다가갑니다. 청년은 뼈만 남은 환자의 앙상한 손을 다정하게 잡고 아주 조그마한 소리로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여호와 라파 치유의 하나님, 우리 A 환자 분의 병을 낫게 하여 주십시오. 좀더 시간을 주셔서 사랑하는 가족들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더 보게 하여 주시고, 무엇보다 예수님을 믿고 신앙을 고백하게 하여 주십시오. 저는 치료만 할 뿐이니, 우리 주님께서 몸과 영혼을 깨끗하게 치유하여 주실 것을 믿습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청년 의사는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조용히 병실 문을 열고 나갑니다. 꼼짝도 하지 않던 환자의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눈에서 눈물이 흐릅니다. 어쩐지 마음이 따듯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오랜 병치레에 지쳐 가족들도 줄 수 없는 따스함을 청년 의사가 믿는 예수님의 사랑이 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삶을 가장 아름답게 사는 방법은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의 최고 표현은 시간을 내어주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하기 가장 좋은 시간은 바로 지금이다. (릭 워렌 Rick Warren)
"우리 의사들의 직업은 목사와 같은 성직이다. 나는 교회가 목사를 임명하는 것과 똑같이 의사도 임명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과도 일치한다. 우리가 온 마음과 영혼을 다해 우리의 직업에 몸을 바치는 것도 바로 이 신념 때문이다. (폴 트루니에 Paul Tournier, M.D.)
"의사는 병원의 제사장이란다.
목사는 교회에서 제사장이고, 교수는 학교에서 제사장이지.
그래서 만인이 다 제사장이라고 하는 것이란다. ......
그동안 교회와 교인들은 세상이라는 무대를 잊었단다.
그리고 오직 교회만 무대인 줄 알았지. 세상이라고 하는 중요한 무대를 잃어버리고
교회에만 몰려서, 누가 주연인가만을 놓고 쓸데없고 지루한 싸움만 계속했지.
그날 중환자실에서 너는 왕 같은 제사장이었다. 네가 자랑스럽다....
하나님께 감사한다. 좋은 의사, 훌륭한 제사장이 되거라. 그곳에서......"
- 김동호 (높은뜻숭의교회 담임목사)
"아주머니, 그러니까 그저 예수님께 나아가기만 하면 돼요. 아주머니가 어떻든 그분이 아주머니를 사랑하기로 결정하셨기 때문이에요. 탕자는 아버지의 사랑을 깨달아서 돌아온 게 아니라 그저 배가 고프고 비참해서 돌아왔을 뿐이죠.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상한 동기를 요구하지 않으세요. 우리가 어떤 이기적인 이유로 아버지께 돌아온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받아 주세요. 그 사랑을 그냥 받아들이세요."
* 그래도 젊은 날에 내가 기쁨으로 바랐던 일들을 맘껏 해볼 수 있었고, 그 일들이 다른 사람에게 미력하나마 도움이 되는 역할을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흐뭇하다. 이제 아마추어로서 조용히 내 관심 영역을 누리면서, 의사라는 프로 영역에서 내 역량을 준비해 가야 할 것 같다. 그 외적이 모습이 의료의 현장이든, 예배의 현장이든, 모든 것이 늘 주님을 선택하는 삶이라는 것은 동일한 진리다.
*초등학교 시절 수현이는 보이스카우트에 들지 않았습니다. 주일 예배에 빠질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부흥회가 있는 날에는 학교를 빠지기도 했습니다. 아주 춥고 눈이 오는 겨울 날에도 할머니는 교회에 빠질 수 없었습니다. 어린 수현이가 막무가내로 끌고 나왔기 때문이지요. 그때도 수현은 어린 목자였습니다. 동네 친구들에게 전도를 해서 우르르 몰고 사당동에서 을지로에 있는 교회로 전철을 타고 갔습니다. 옆에 멘 쓰리세븐 보조가방에는 친구의 생일선물로 줄 만화 성경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는 어딜 가나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당당하게 드러냈습니다. 글을 쓸 때도, 사람을 만날 때도, 무얼 먹거나 마실 때도, 그는 한결같이 크리스천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알려지면 불이익을 받을 것이 확실해도 그는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에겐 그는 밥맛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밥맛없는 그가 말을 하거나 행동을 하면 사람들이 신뢰했습니다. 그는 어디에 가도 그 빛을 잃지 않는 푸른 나무였고, 요동하지 않고 성전을 떠받치고 서 있는 대들보였습니다.
* 때로 곁에 있어 주지 말아야 할 때도 있다.
그 작은 자가 혼자 서는 연습을 해야 할 때일 수도 있다.
또는 당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도와주어야 할 순간일 수도 있다.
당신의 때와 방법이 아닌, 주님의 때와 방법을 구해야 한다.
주님보다 먼저 치고 들어가는 것은 오프사이드(offside) 반칙이다.
* 아직도 고 안수현의 친구들은 모이면 자연스럽게 수현의 얘기를 합니다.
특히 어딜 가다가 길을 잃었을 때 인간 내비게이션이라 불리던 수현이 더욱 그리워집니다.
"수현아, 나 어디로 가야 하는 거니?"
아직 순례의 길이 남은 친구들은 천국까지 전화를 걸어 지금 자기가 가는 길이 옳은 방향인지 물어보고 싶을지도 모릅니다. 그의 후배 의사들은 환자에게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습니다. 그 기준은 '마지막까지 환자의 생명을 붙들고 싶은 보호자의 마음으로 돌보는 것'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