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현암사에서 <채근담> 개정 초판 편집에 참여하고 발행한 게 1996년 4월이니 참으로 오래도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별로 대수롭지 않겨 여겼던지 눈에, 마음에 들어오지 않던 내용이 이제는 마음에 느껴지고 깊이 들어와 앉습니다.
그때는 교정을 보면서도 조지훈이라는 이름 석 자가 (학생 때 국어 교과서에서 박목월, 박두진 시인과 함께 청록파 시인이라는 이름으로나 보았기 때문에) 까마득히 옛사람이라고 느꼈는데, 지금 와 다시 읽으며 생각해 보니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는 걸 새삼 알게 되었습니다. 조지훈 시인은 1920년에 출생하여 1968년에 별세하여 향년이 47세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지금으로 보면 너무나도 꽃다운 한창 때 돌아가신 것입니다.
조지훈 시인이 이 <채근담>을 번역하게 된 것은 바로 출판사 현암사의 고 조상원(호 현암) 사장님의 권유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현암 조상원 사장님은 제가 편집쟁이로 갓 입사했을 때는 이미 회장님이셨고, 칠순을 넘어 미수에 이르렀을 때도 출근하여 늘 일선에 계셨으며 매우 장수하셨습니다.
조지훈 시인이 장수하셨다면 동시대를 살면서 가까이서 뵐 수도 있었겠구나 하며 참 아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지훈 시인이 <채근담>을 번역하던 때는 병으로 누워 투병하던 기간이라고 합니다. 투병을 겸해 정신을 가다듬고 새벽마다, 초저녁 등불 아래서 하루에 네댓 장씩 일과처럼 번역을 하셨다고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채근담>을 읽으면서 한 편 한 편 시를 읽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일반 한학자가 번역을 했다면 다른 느낌이었을 것 같은데, 현암 조상원 회장님의 사람 보는 혜안이 참으로 탁월했음을 알겠습니다. 아마도 두 분은 서로가 이심전심 정말 마음이 잘 통하는 분들이셨을 것 같습니다.
지은이: 홍자성
역주: 조지훈
목차:
1장 자연의 섭리
2장 도의 마음
3장 수신과 성찰
4장 세상 사는 법도
역주자의 말:
"읽을 때마다 그 맛이 깊어지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나물 뿌리의 담백한 맛이 씹을수록 달듯이
<채근담>의 맛도 읽을수록 향기롭기 때문이리라.
나이와 공부에 따라 더욱 새로워지는 이 책은 어느 때 누가 읽더라도 그 사람의 기틀에 맞추어
그 맛이 달라지는 까닭이다. 뭇사람과 기꺼이 어울리되 그 더러움에는 물들지 않고
드높은 경지에 뜻을 두어도 쓸쓸한 생각에 빠지지 않게 하는 <채근담>은
참으로 좋은 스승이라 할 수 있다."
일러두기
이 책은 홍자성의 <채근담>을 바탕으로 하여 그 전, 후집 359장을 새로이 옮긴 것입니다.
원저는 전집 225장과 후집 134장으로 나누어져 있으나 그것은 편의상의 분편일 뿐 내용에는 뚜렷한 특색이 없으므로
조지훈 역주자는 전, 후집을 뒤섞어서 비슷한 것끼리 한데 모아 네 편으로 나누어 다시 배열하였습니다.
최대한 쉬운 현대어로 옮기되 원문의 맛을 살리기 위해 의고체를 쓰기도 하였고, 운문의 격을 빌려 소리내어 읽기도 쉽게 옮겼습니다.
*산림에 숨어 사는 즐거움을 말하는 사람은
아직 산림의 참맛을 깨닫지 못하였고,
명리를 말하기 싫어하는 사람은
아직 그 마음이 명리를 잊지 못한 것이다.
*길고 짧은 것은 한 생각에서 말미암고
넓고 좁은 것은 한 치 마음에 매였도다.
마음이 한가로운 이는 하루가 천고보다 아득하고
뜻이 넓은 이는 좁은 방도 천지같이 너르리라.
*물욕을 덜고 덜어 꽃 가꾸고 대를 심으니
이 몸 이대로가 무위로 돌아간다.
시비를 잊고 잊어 향 사르고 차를 달이니
모두 나 몰라라 무아의 경지로다.
*사람의 정이란 꾀꼬리 소리 들으면 기뻐하고
개구리 울음 들으면 싫어하며
꽃을 보면 가꾸고 싶고
풀을 보면 뽑고자 하니,
이는 다만 형체와 기질로 사물을 갈라 봄이라.
만일 마음 바탕으로 본다면 무엇인들 스스로 하늘 기틀 울림이 아니며
스스로 그 뜻을 펴는 것이 아니리요.
*마음에 욕심이 일면 차가운 못에서도 물결이 끓어오르니
산 속에 있어도 그 고요함을 보지 못하고,
마음이 비면 무더위 속에서도 서늘함이 일어나니
저자에 있어도 그 시끄러움을 모른다.
*늙어서 젊음을 보면 바삐 달리고 서로 다투는 마음이 사라질 것이요,
영락하여 영화롭던 때를 떠올리면 사치스럽고 화려한 생각을 끊을 것이다.
*간장이 병들면 앞을 볼 수 없게 되고
신장이 병들면 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되니,
병은 사람이 볼 수 없는 곳에 들지만
반드시 사람이 볼 수 있는 곳에 나타난다.
그러므로 군자는 밝은 곳에서 죄를 얻지 않으려면
먼저 어두운 곳에서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
<채근담>을 읽다 보면 마치 성경 중 <잠언>을 읽는 것과 아주 비슷한 느낌이 듭니다. 예전의 교과서 <도덕> 즉 <바른생활>과 성경 중 <잠언>과 <채근담>은 서로 통하는 데가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가 우리 생활에 들어맞는 윤리의 바탕이 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자연과 인생에 관한 명상" 도서인 이 책은 중학생 이상이 읽으면 좋을 추천도서입니다. 조지훈 시인은 <채근담>을 열입곱 살 때 처음 읽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시 읽은 때는 스물두 살 때. 읽은 때마다 느낌이 다릅니다. 저도 20대 때 읽었을 때랑 지금 읽는 느낌은 사뭇 다릅니다. 한 번 읽었다고 끝내지 말고, 어쩌다 한 번씩 다시 꺼내어 읽어 보면 점점 깊은 맛이 느껴진다고 할까요.